[뉴스] [경희의 유산] ⑲세계적인 대학 캠퍼스 청사진을 밝히다
경희의 유산 ⑲ 『우리 대학 최초 마스터플랜』
# 작년 9월부터 경희기록관은 우리신문과 함께 ‘경희 유산을 찾아서’를 연재한다. 서울, 국제, 광릉 캠퍼스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유산과 자연 유산은 물론 경희기록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 대학의 역사적 기록물, 경희만의 고유한 정신 유산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관한 역사적 사실,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 숨겨진 흥미로운 에피소드 등을 글과 사진으로 소개한다. 1차로 여름까지 연재를 진행하고, 1년간의 연재 결과를 바탕으로 내용과 형식을 보완해 2차 연재를 진행할 계획이다.
▲<사진1> 고황산 정상부 능선과 회릉으로 뻗어 내려오는 주능선 (1961년도 사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피난지 부산에 있던 많은 대학들이 서울로 환도하는 정부를 따라 올라가고 있을 때, 서울에 교사가 없었던 우리 대학으로서는 무척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동광동 가교사가 화재로 소실된 이후, 동대신동에 새로운 가교사를 완공(1953.3.20.)한 지 5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동대신동 가교사를 떠나 서울로 이전하기에는 경제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결단에 찬 고민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1953년 8월 경, 「세계적인 대학 건설」이라는 미래 비전을 하나의 명분으로 삼아 서울 이전을 최종 결정하고, 시급히 교지 물색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학교 부지 선정의 기준은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대학 건설」에 걸맞는 규모가 되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이 부지 위에 창학이념과 우리의 미래 지향성을 충분히 담을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한 지금의 고황산(천장산) 자락이 최종 부지로 선정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1953년 고황산 일대를 살펴 보면, 이곳은 지금처럼 풍광이 아름다운 곳은 아니었다. 단지 채석을 위한 조그마한 길과 초가 몇 채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산은 이미 벌거숭이 황무지였으며 잡초마저도 거의 자랄 것 같지 않은 메마른 땅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황량한 자연환경이 오히려 빈 백지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지형을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입체적이고 아름다운 캠퍼스를 만들 수 있겠다라는 역발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으로 고황산 중턱에 있는 청운대에 올라 이 고황산 자락에 펼쳐질 대학원(大學園) 건설을 구상하였고, 거칠고 넓은 무(無)의 대지 위에 건설의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 대학이 위치한 고황산 자락을 보면, <사진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황산 정상부 능선이 있는데, 이 능선 안쪽이 바로 우리 대학의 부지이다. 또한 고황산 정상부 능선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주능선이 있고, 그 주능선 끝자락에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의 능인 회릉(懷陵, 1969년 10월 25일 서삼릉으로 이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 대학은 이 주능선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공간으로 양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주능선을 경계로 동쪽은 강학공간, 서쪽은 자연녹지공간으로 구성하고, 일단 강학공간을 중심으로 최초의 마스터플랜을 설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자연녹지공간인 서쪽부분은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막아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인 선동호(仙洞湖)를 축조했고, 이 계곡에 ‘신선들이 와서 거문고를 켠다’라는 뜻의 선금교(仙琴橋)도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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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1차 마스터플랜(1954년 12월 28일)
그리고 강학공간인 동쪽부분은 대학의 중심 공간이기 때문에 부지 선정 직후인 1953년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마스터플랜을 설계하기 시작하였다. 즉, 1953년 11월 24일 ‘천년 이상 가는 본관과 캠퍼스 기공식’을 거행하였고, 뒤이어 12월 20일에는 본관 석조전을 짓기 위한 첫삽을 뜨게 되었다. 1953년부터 설계되기 시작한 1차 마스터플랜은 4년제 종합대학 설립 신청서를 제출하게 되는 1954년 12월 28일에 최종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년제 종합대학 설립 인가(1955.2.28.) 이후, 마스터플랜에 입각한 건물을 건축해 나가는 과정에서 공간 조정 및 확대, 그리고 재배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 마스터플랜의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하게 되었으며, 1960년대 초엽에 이르면, 2차 마스터플랜인 「경희대학교 교사분포전경도」가 최종 완성되었던 것이다.
캠퍼스 공간 배치를 보면, 고황산을 배경으로 그 아래 가장 중심 건물인 본관 석조전을 배치하고, 그 남쪽에 교시탑과 정문으로 이어지는 남북 기본축을 마련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교시탑에서 동서로 연결되는 십자대로를 만들고, 이 십자대로를 중심으로 건물들을 다양하게 배치함으로써 캠퍼스 공간 활용도를 높이고 있다.
또한 고황산 주능선 안쪽을 따라 흐르는 개천을 정비하여 배수로를 설계함과 동시에 이곳에 여러 개의 다리(훗날 황궁교, 가령교, 청운교-대성교로 명명)를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배치는 우리나라 도성 건축 방식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공간배치가 가능했던 것은 고황산 일대가 처음부터 빈 백지와 같은 황무지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1차,2차 마스터플랜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는 본관 앞 분수대 정원의 모습이다. 즉, 본관을 완공한 결과, 의외로 고황산이 너무 높게 느껴져 오히려 본관이 작아 보이는 듯한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본관을 좀더 크게 보일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그 결과로 지금 본관 앞 분수대를 만들면서 그곳의 땅을 아예 파버리게 되었다.
즉, 땅을 파버리게 되면 상대적으로 본관 건물이 높아져 보이게 되는, 그래서 건물 자체가 굉장히 크고 육중해 보이는 방식으로 설계 변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1차,2차 마스터플랜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마스터플랜에서 조금 의아했던 부분은 현재 청운관 자리에 설계된 노천 풀장, 본관 서쪽에 있는 교회와 대학연혁대 설치 계획 등이었다. 이 설치 계획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설치하려고 했던 구체적인 이유만큼은 지금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특히 캠퍼스 건설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인간교육과 정서교육이었고, 이를 위해 공원 속의 대학을 건설하겠다라는 굳은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건물 건축과 발맞추어 자연환경 미화에도 신경을 썼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캠퍼스 풍치를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의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육은 환경을 기저로 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즉, 자연과 인간 관계를 중시하여 「자연을 사랑하자」, 「자연에서 살자」, 「자연에서 배우자」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연주의 캠퍼스 건설 의지가 마스터플랜에 잘 녹아 들어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처럼 우리 대학 캠퍼스는 1953년부터 시작된 1차 마스터플랜, 1960년대 초엽에 완성된 2차 마스터플랜에 입각하여 지속적인 캠퍼스 건설과 공간 배치가 이루어짐으로써 세계적인 대학 건설을 위한 내적 역량이 어느 정도 축적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적 역량을 바탕으로 1960년대에는 해외 대학 자매결연 협약, 세계대학총장회의 개최 등 글로벌 공공협력을 통한 세계 속의 경희를 적극 추진하면서「세계적인 대학 건설」을 위한 외적 역량 강화에 한층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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