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경희의 유산] ⑤본관 앞 소나무-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심은 꿈
# 9월부터 경희기록관은 우리신문과 함께 ‘경희 유산을 찾아서’를 연재한다. 서울, 국제, 광릉 캠퍼스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유산과 자연 유산은 물론 경희기록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 대학의 역사적 기록물, 경희만의 고유한 정신 유산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관한 역사적 사실,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 숨겨진 흥미로운 에피소드 등을 글과 사진으로 소개한다. 1차로 내년 여름까지 연재를 진행하고, 1년간의 연재 결과를 바탕으로 내용과 형식을 보완해 2차 연재를 진행할 계획이다.
1년 전 11월 하순의 어느 날, 서울에는 이례적인 폭설이 내렸다. 밤새 내린 눈은 캠퍼스를 아름다운 은세계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많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1954년 봄 서울캠퍼스가 탄생하기 전부터 이곳 고황산 기슭을 지켜온 수령 수백 년의 소나무들이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가지가 부러지는 피해를 입었다. 그중 특히 많은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 나무가 있었는데, 바로 본관 정면 좌측에 있는 소나무다.
『경희 20년』(1969년)에 의하면, 이 소나무는 본관 석조전이 지어지는 장면을 지켜본 주인공이다.
1953년 12월 시작된 본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때, 설립자를 비롯한 교직원과 학생들의 눈에는 석공들의 일하는 모습이 한없이 느리게만 보였다.
돌이 쌓여 올라가는 속도보다 하루빨리 완공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앞서 내달렸기 때문이다. 매일 공사 현장을 감독하던 김명복 체육대학장과 김광선 학생처장은 이 소나무를 가리키며, ‘어서 저 소나무 키만큼이나 쌓아 올렸으면 좋겠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1956년 8월 완공 직전의 본관을 바라보는 소나무 (사진=경희기록관 제공)
경희가 지금의 터를 잡고 캠퍼스를 조성하기 전, 고황산 기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경희 20년』에 따르면, 이곳 일대는 채석장이었다. 채취한 돌을 운반하기 위해 소달구지가 다니던 길이 한 줄기 있었고, 길 들머리에 허름한 초가가 몇 채 자리 잡고 있었다. 소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었지만, 인근 주민들이 땔감으로 자른 흔적이 보이고, 낙엽마저 쓸어가 버린 그야말로 벌거숭이 황무지였다. 잡초마저 자랄 것 같지 않은 메마른 땅은 그저 황막한 산골짜기에 불과했다. 설립자 조영식 박사가 캠퍼스 후보지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동료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교지로서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오늘의 경희 캠퍼스는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 경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초창기부터 매년 봄가을 총장을 비롯한 교직원, 학생들이 나서 황무지 같은 캠퍼스 곳곳에 꽃과 나무를 심었다.
캠퍼스 설립 후 20여 년간 그렇게 심은 꽃과 나무가 30만 본 이상이었다고 한다. 관리에도 공을 들여, 매년 봄과 여름엔 소독 작업을 했고, 학생들은 송충이 잡이에 나서곤 했다. 이런 노력은 단지 캠퍼스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대학의 사명은 전인적 인격을 갖춘 문화인을 키우는 데 있으므로 자연에서 인간을 발견하고, 인간 안에서 자연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 경희의 오랜 철학이었다. 지금 우리 캠퍼스를 이루고 있는 나무와 꽃, 돌과 연못들은 모두 이런 철학의 반영이며, 선배 경희인들이 한마음으로 일구고 가꿔온 소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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