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경희의 유산] ②문화세계의 창조-필화 넘어 살아남은 창학 정신, 『문화세계의 창조』
연재-경희의 유산 ②『문화세계의 창조』
# 9월부터 경희기록관은 우리신문과 함께 ‘경희 유산을 찾아서’를 연재한다. 서울, 국제, 광릉 캠퍼스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유산과 자연 유산은 물론 경희기록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 대학의 역사적 기록물, 경희만의 고유한 정신 유산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관한 역사적 사실,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 숨겨진 흥미로운 에피소드 등을 글과 사진으로 소개한다. 1차로 내년 여름까지 연재를 진행하고, 1년간의 연재 결과를 바탕으로 내용과 형식을 보완해 2차 연재를 진행할 계획이다.
경희의 창학정신이 정초된 책 『문화세계의 창조』는 설립자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의 두 번째 저서다. 책의 원고를 탈고한 1951년 5월 18일은 그가 경희의 전신인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한 날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6월 30일 초판본이 출간됐다.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더욱이 화재로 부산 동광동 가교사가 전소되면서 대학의 자료들과 함께 이 초판본도 대부분 유실됐는데, 설상가상으로 뒤에 언급될 필화 사건을 겪으면서 결국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러던 것을 2014년 경희기록관장 김희찬 교수가 전국의 헌책방을 수소문해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책 표지에는 유엔 마크와 함께 푸른빛이 선명한 지구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표지가 그려진 1951년 당시에는 아무도 우주에 나가 본 사람이 없었고, 당연히 지구의 색깔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푸른 지구는 저자 조영식 박사의 상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 경희기록관장 김희찬 교수가 헌책방을 수소문해 입수한 책으로, 현재 경희기록관에 있다. (사진=경희기록관 제공)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시대, 닫힌 이념과 편견의 장벽을 넘어 인간의 인간적인 세상, ‘문화세계’를 열어가자는 것이『문화세계의 창조』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책이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소위 불온사상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1955년 7월, 당시 총장이던 조영식 박사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대학을 찬탈하려는 몇몇 이사와 교수들의 음모로 벌어진 일이었다.
조 총장의 구속 소식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주요 언론들이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대학 사회는 물론 학계와 정부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게 일었다. 수사당국은 정치, 철학 분야 이름 있는 학자들에게 의뢰해 책의 내용을 검토하게 했다. 문교부도 학술원에 정식으로 내용 감정을 위탁했다. 그 결과 이 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내용의 서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사건 발생 1년여 만인 1956년 6월, 조 총장은 무혐의 불기소 처분됐다.
이 사건은 대학은 물론 조 총장 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이를 계기로 경희는 구성원 모두의 결속을 더욱 강화해 개교 10주년을 향해 다시 한번 도약하는 전환점으로 바꿔냈다.
『문화세계의 창조』는 “새로운 세기는 새로운 정치 이념을 필요로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정치인이 사용할 법한 문구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대립과 폭력, 무고한 살상을 불사하는 현실정치가 아니라 평화로운 인간의 인간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삶의 정치, 지구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의 양심과 이성에 귀 기울이고, 이웃과 사회, 세계,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전일적 시민성을 저자는 강조한다.
책이 세상에 나온 지 74년이 지났다. 지금 우리는 매일매일 문명의 위기 징후들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책의 서문이 말하듯, “세계는 지금 조난당한 난파선!...묘안과 창의적인 방안을 찾지 않는 한 침몰은 막을 수 없다.”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메시지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모든 세계는 결국 우리의 의식과 인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의식 세계가 현실을 만들고, 인간의 미래를 만들어간다. 보편과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 열린 마음. 그런 ‘인간적인 문제의식’을 갖는 것에서부터 인류와 문명의 살길, ‘문화세계’가 열려갈 것이라는 저자의 호소에 귀 기울일 때다.
▲ 조영식 총장 구속과 저서 압수를 보도한 1955년 8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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