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창간 70주년-나는 주간교수다③] 대학언론을 사랑한 13년, 학생과 부딪히고 공감하다 “네 글을 써라”던 교수, 지금도 질문 멈추지 않는다
창간 70주년
나는 주간교수다③ - 정관수(전자공학·국제캠 주간)
# 창간 70주년을 맞아 대학주보는 역대 주간 교수를 만나 그들이 겪은 대학과 사회의 현실, 덜 다듬어진 학생기자들을 어루만져온 그 시간을 들어보았다. 세 번째 순서로, 국제캠 신문방송국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크게 기여한 정관수 전 주간의 이야기다.
“군부타도! 독재철폐! 정권타도!”
젊은 시위대의 함성이 하늘 높이 메아리쳤다. 1984년, 학생이 직접 뽑은 총학생회가 탄생하고 지하에서 이뤄지던 학생운동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서울캠 노천극장 근처에서 시작한 집회는 매일 같이 정문 앞까지 이어졌고, 대기하고 있던 전경은 최루탄을 퍼부었다. 정문부터 본관까지 줄지어 있던 벚꽃 나무가 최루 가스를 머금은 탓에 며칠이 지나도록 교정에선 지독한 냄새가 빠질 줄을 몰랐다. 최루탄 냄새와 함께 벚꽃, 라일락, 아카시아의 향기가 뒤섞인 오묘한 현장이었다.
수원캠(현 국제캠)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시위가 서울보다 많지는 않았지만, 총학생회 주도로 학생운동은 존재했다. 33기 이철주(불어불문학 1983) 동문은 “학생들이 교문 밖까지 진출했는데, 전경이 진압해오자 당시 진입로 양쪽 밭으로 산개해서 투석전을 펼쳤다”며 “학생들이 근처에 있던 지름 60~80센티미터 하수도관을 굴리는 바람에 전경들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며 그곳의 최초 시위를 회상했다.
투사 기질 다분했던 기자들
일상적이었던 의견 충돌
그렇게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6년 3월, 키가 크고 멀끔한 행색을 한 정관수(전자공학) 교수가 공대 5층 대학주보 편집실에 나타났다. 전공인 전자공학이 방송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것이 주간을 맡은 배경이었다. 신문방송국 역사상 최초의 이공계열 출신 주간이었다.
하지만 대학주보 구성원은 문과 위주였기에, 다소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34기 마정미 동문(불어불문학 1985)은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입은 와이셔츠는 하루 이상 입지 않는 멋지고 까탈스러운 분이었고, 매우 보수적이었다”며 첫만남을 떠올렸다.
신문방송국 일원으로 처음 떠난 방중 세미나. 4시간 동안 기자들과 대작해야 했던 정 교수는 대학주보의 야만적인 술 문화에 황당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새로 온 교수가 얼마나 술을 먹는가 한번 보자”, “저놈들이 날 싫어하는구나.” 서로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정 교수는 당시 학생 기자들이 학교 신문을 사회 신문으로 사용한다고 느꼈다. 주된 고민거리였다. “왜 학교의 얼굴인 대학주보에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너희 생각에서 학생에게 주입하려고 하느냐?”, “그렇게 너희 생각을 강조하고 싶으면 신문이 아니라 유인물을 만들어서 학생에게 나누어주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 정 교수는 학생 기자들이 사회를 읽는 눈을 키울 수 있도록,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려 노력했다. (사진=이지수 기자)
하지만 기자들은 물러서긴커녕 “학교 신문은 학생 등록금으로 제작되는 만큼 학생 의견이 반영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며 팽팽히 맞서곤 했다. 37기 정연욱(영어영문학 1988) 동문은 “교수님은 젊은 학생 기자의 진취적인 생각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부분에 대해 학생기자와 토론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 오케이를 내주지 않는다며 원고를 던지고 나가버린 33기 임종성(경제학 1983) 동문을 붙잡고 정 교수가 말했다. “너희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어. 너희들보다 똑똑한 사람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많아. 근데도 이건 못써” 37기 정 동문의 말처럼 정 교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앉은 자리에서 기자와 타협을 보는 스타일이었다.
깊어진 애정으로
국제 신방국 발전 이끌어
신문방송국에 쏟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전자공학과 교수로서의 사회 활동은 줄여야 했다. 주간이라는 무게감이 어깨를 짓누를 때도 있었다. 매주 토요일을 반납하고 조판하며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기자들 몰래 몇 번이나 사직서도 냈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번번이 수리되지 않았다. 신문방송국과 끈질기게 이어진 인연은 정 교수가 주간직을 내려놓은 1998년까지 무려 13년간 이어졌다. 그렇게 정 교수는 역대 주간 중 가장 긴 기간을 재임했다.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정 교수는 기자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누구보다 크게 가지게 됐고 학생도 이를 느낄 수 있었다. 34기 마 동문은 “기사 때문에 논쟁해도 그분이 밉거나 서운하지 않았다”며 “가족처럼 편안하고 의지하는 분이 됐다”고 말했다. 35기 박용집(임학 1986) 동문은 “학생과 자주 가던 막걸리집에서 프랑스 샹송 ‘My Way’를 통기타를 연주하며 처음 불러주셨던 날이 생각난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간간이 댁에 불러 집밥을 먹여주신 기억이 있다”는 33기 이 동문은 정 교수가 내어준 귀한 50도 술을 먹고 처음 느껴본 그 찌르르함이 생생하다. 37기 정 동문은 “교수님은 미국 유학 중이던 대학의소리방송국 출신 제 여동생 안부를 물으며, 귀국할 때 ‘장미 나무 담배 파이프를 주문’하시던 솔직담백한 모습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국제캠 신문방송국이 지금의 외형을 갖추게 된 것이 정 교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 특유의 행정력을 발휘해 공대 5층에 있던 12.5평 남짓 편집실을 지금의 학생회관 건물로 이전하는 결단력을 보여줬다. 새로 옮긴 신문방송국 자리에 자료실과 행정실을 두었고, 자체 예산을 할당했으며 처음으로 정식 조교를 임명해 조직을 조직답게 꾸려갔다. 학교 측에 “서울캠과 똑같이 취급하라”며 목소리를 냈던 탓에 “공대 교수가 그곳에서 도대체 왜 그러냐”는 비아냥도 주위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던 참이었다.
사회를 읽는 눈을 키우도록
끊임없이 질문하던 주간
주간 시절 정 교수가 학생 기자에게 바랐던 점은 단 하나였다. 남의 생각이 아닌, 자신만의 주관을 가지고 글을 쓰라는 것. 그래서 질문을 아끼지 않았다. “너희들이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해봐. 네가 느끼고, 네가 생각하는 걸 말이야”, “이 글이 네 글이야? 남의 생각을 베끼는 건 낙서일 뿐이지 네 글이 아니야”, “나는 A라고 생각하는데, 너희들이 B라고 바라보는 근본적인 이유는 뭐야?” 그는 자신이 아끼는 학생 기자들이 사회를 읽는 눈을 키울 수 있도록,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려 했다.
민주화가 이뤄진 지금, 정 교수에게 주간을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요새 기자들이랑 갈등 더 심할 수도 있어. 지금 봐봐. 학교에서도 탄핵 반대 찬성 갈라져서 그러잖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우리 근본적인 것부터 다시 따져볼까?” 그의 눈은 여전히 시대를 읽고, 현실을 깊이 성찰하려는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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