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옛 법학서 기증한 송태진 동문, 66년 전 사법고시 합격자에서 기업가로의 여정
# 사법시험의 전신인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던 송태진(법학 1956) 동문이 고시 준비 당시 사용했던 법학 서적을 기증했다. 이번에 기증된 서적들은 송 동문이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읽었던 법학서들로 7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신문은 그가 오래된 서적에 담아 후배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학구열과 메시지를 들어봤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법고시에 매진했던 그는 3번째 도전 끝에 고등고시 사법과 12회에 합격하게 된다. (사진=한민 기자)
1936년생으로 올해 구순을 맞은 송태진 동문의 학창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누나와 함께 청계천 판자촌에서 생활했으며,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고향 상주에서 피난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송 동문은 “한 달 반 동안 하루에 한 끼씩만 먹었기에 배고픔이라는게 뭔지 잘 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공부’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956년 우리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당시 신설 대학이었던 학교에 도서관이 없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송 동문은 인근 고려대학교 도서관을 몰래 이용했다. 그렇게 고려대 도서관에 아침 일찍 들어가 밤 늦게 나오며 치열하게 공부했는데, 경비원이 그 모습을 보고 기특한 자교 모범생이라고 생각해 손수 전용 좌석을 준비해주기도 했다.
당시 우리학교에는 민법학 권위자인 안이준(법학) 교수가 부임해있었기에 민법 분야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법고시를 준비할 수 있을 정도의 강의 여건은 갖추지 못해 고려대 강의를 몰래 들었다. 송 동문은 이때를 회상하며 “고시 준비 과정은 대부분 독학이었는데, 독학의 비중이 3분의 2였다면 부족한 3분의 1은 고려대에서 채웠다”고 설명했다. 강의를 같이 듣던 고려대 학생 중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3대 고시인 고등고시 사법과, 고등고시 행정과(구 행정고시), 고등고시 외무과(구 외무고시)를 모두 통과했던 장덕진 전 농수산부장관도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법고시에 매진했던 그는 3번째 도전 끝에 고등고시 사법과 12회에 합격하게 된다. 송 동문은 “고등고시 사법과는 이후 수백 명이 뽑혔던 사법시험과 달리 수십 명 내외를 뽑았던 시험이라 3번 만에 붙는 건 대단한 거였다”고 말했다. 우리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박정훈 원장은 “그때는 대학에 따라 교수들의 강의만 잘 따라가도 고시를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며 “신설 대학이었던 우리학교의 학생이 학습 자료를 구하고 공부해서 합격한 건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라고 전했다.
송 동문에게 있어 그토록 공부에 정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단지 홀어머니 하나 뿐이었다. 그는 “홀로 자식들을 부양했던 어머니의 헌신을 보며 반드시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마음으로 사법시험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이어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어머니만을 보고 버텼다”고 회고했다.
이번에 기증된 서적들은 송 동문이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읽었던 법학서들로 7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송 동문은 “처음부터 기증을 목적으로 보관한 것은 아니었다”면서도 “어느 날 문득 이 책들에 남은 그 시절 공부의 흔적들로 하여금 지금의 학생들에게 ‘나도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를 피부로 느끼게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지금까지 보관해오게 됐다”고 밝혔다.
송 동문은 고시 합격 이후 검사 생활을 했다. 그가 맡은 사건 중에는 부실 시공이 부른 대표적인 참극인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도 있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이 사건은 서울시청 행정력만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하다”며 검찰에 지시문을 내렸고, 이에 송 동문이 나서서 수습을 맡게 된 것이다. 그가 현장에서 본 와우아파트 건축 실태는 엉터리 그 자체였다. 벽돌만 쌓아올린 수준이었는데, 송 동문은 이를 두고 “건축이 아니라 애들 소꿉장난이었다”고 말했다. 분노한 송 동문은 당시 관계자 125명을 호텔 한 층에 전부 모아놓고 “내가 당신들 잡으러 온 사람들이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꼼짝 말고 있으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번에 기증된 서적들은 송 동문이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읽었던 법학서들로 7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진=한민 기자)
이후 송 동문은 관세청으로 이직했고 세관장에 올랐다. 관세청은 설립 초기였던 박정희 정부 시절 ‘밀수 잡는 기관’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초대·2대 관세청장이 법조인 출신이었을 정도로 법조계와 가까운 기관이었다. 내부 불화로 사직한 이후에는 관세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9년부터는 창업에 뛰어들었고, 현재까지 기업인의 길을 걷고 있다. 기업가의 길을 택한 계기에는 정상영 초대 KCC그룹 회장과의 인연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송 동문과 초등학교 동문이었던 정 회장은 면세 물품 처리 과정에서 문제를 겪고 있던 중 과거 인연을 상기해 송 동문에게 접촉했다. 사건 처리 이후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가 됐는데, 어느 날 정 회장이 “작은 공장 하나 해볼 생각 있느냐”고 물었다. 송 동문은 “변호사가 어떻게 공장을 하느냐”고 난색을 표했으나 정 회장은 “쉬운 깡통 공장을 한 번 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송 동문은 깡통 공장 경영을 맡으며 기업인으로 나아가게 됐고, 이후 사업을 확장해 현재는 해외까지 포함해 다섯 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송 동문은 “300명 정도를 고용하고 있는데, 한 집에 네 식구라고 가정하면 천 명 정도를 내가 먹여살리고 있는 것 아닌가”라며 소회를 밝혔다.
이처럼 한 분야에 안주하지 않고 여러 분야에 도전하는 삶을 살았던 송 동문은 “관세청을 그만두고 잠시 변호사를 했을 때도 돈을 많이 벌었지만 한 기업을 운영하는 정도의 돈을 벌 수는 없었다”며, “말년에 인생을 돌이켜보니 결과적으로 잘 살았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우리나라 격변의 시기 다양한 경험과 도전을 거친 송 동문은 ‘전문가 자질’을 가지도록 강조했다. 그는 “과거에는 공부를 하러 우리나라에서 다른 선진국으로 유학을 많이 떠났지만 이제는 우리나라도 충분히 선진국이 됐다”며 “지금은 기술이 가장 중요한 시대이므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정도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후배 학생들을 향해 조언했다.
송 동문은 우리학교 출신 법조인 모임인 경희법조인회의 ‘자랑스러운 경희법조인상’ 1회 수상자이자, 과거에도 법학도 후배들을 위해 1억 원을 기부하는 등 우리학교와의 인연을 꾸준히 이어왔다. 송 동문이 기증한 서적은 향후 법학전문대학원 도서관에 보관 및 전시될 예정이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1
- 2
- 3
- 4
- 5





